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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삶의 치유로서의 수필 쓰기 / 엄현옥

by 미루me 2014. 4. 4.

삶의 치유로서의 수필쓰기

 

/ 엄현옥

 

 

들어가며

 

문학의 대상은 인간이다. 문학은 각기 다른 환경과 개성을 가진 인간의 삶을 탐색하고 그것을 반영한다. 거기에 더해 작가의 정서를 표출하거나 아나갈 길을 제시한다면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 또한 왜곡되거나 굴절된 상황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상처를 회복하고 치유하는 것은 문학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다.

독자들은 이러한 문학 작품을 통해 인간에 대한 직관적인 이해를 넓혀 나가며, 희로애락을 간접 경험한다. 더불어 스스로의 정서를 풍요롭게 한다. 삶의 측면을 실증적, 논리적으로 분석, 검증하여 객관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 과학에서는 찾을 수가 없는 기능이다. 과학은 생물학적, 사회학적 특성을 객관적인 연구 분석이나 실험의 결과에 의거하여 논리적으로 기술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입장에서 글쓰기는 어떤 효용을 가질까? 작가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재현하는 정신적 사투를 자처한다. 그것의 결과물인 문학작품의 저작자인 작가에게는 치열한 전투의 상처만이 남는 것일까. 다행스럽게도 작가는 창작을 통해 인간과 세계를 새롭게 경험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의 폭을 넓혀 갈 뿐 아니라 삶의 정수(精髓)를 추출해 내는 기쁨을 맛보기도 한다. 말은 발화와 동시에 사라지지만 글은 생각과 느낌이 오래 남는 자기성찰의 훌륭한 도구이다.

수필세계 2010년 가을호(26호)의 신작 수필에는 이러한 자기성찰의 도구로서의 순기능에 충실한 작품이 많았다. 속내에 꽁꽁 뭉쳐두었을 법한 상처를 드러냄에 있어 삶의 욕구와 의미를 재발견할 수 있도록 문학적 장치를 설정하였다. 심리적 고뇌의 산물이자 무의식 속에서 갈등 중인 다양한 정서의 무늬를 자기만의 문양으로 새긴 작품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동병상련의 페이소스 ; 우종률의 [2인1조]

 

“그렇게 하는게 아니예요.”

[2인1조]의 서두이다. 시작부터 신선하다. 수필에서 서두의 중요성을 언급하는 일은 새삼스럽다. 김진섭은 [문장사담]에서 ‘문장의 도는 발단의 예술’이라 했으며, 러시아의 소설가 안톤체홉은 ‘대부분 작가가 소설에서 실패하는 것은 서두와 결말에 기인된다’고 한바 있다. 자기 고백적인 성격의 수필에서 진솔한 첫마디는 독자의 관심과 독자의 흥미를 유발한다. 그뿐 아니라 앞으로 내용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에 대한 암시의 기능도 담겨있다.

[2인1조]에서 우종률은 실제 있었던 사건에 대해 거두절미하고 처음부터 대화체를 끌어냈다. 서두의 한 문장으로 주의를 환기시킨 후, 현장감있는 중계로 독자를 흡인하는 첫 문단을 살펴보자.

 

“그렇게 하는 게 아니예요.”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순간 당황하여 들고 있던 제품을 떨어뜨릴 뻔하였다.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몇 번이나 달싹거리더니 결국 오늘 터진 것이다. 그와 나사이의 침묵은 그렇게 종지부를 찍고 말았다. 간단한 눈인사만으로 지낸 일주일, 이제 나에 대한 파악이 끝났단 말인가.

-우종률의 [2인1조]중에서-

 

작가가 그를 만난 곳은 두 명이 한 조로 작업하는 회사의 생산 현장이다. 그는 조기 입사로 업무 차악이 끝난 시점이지만 작가에게는 숙련기간이다. 선발이 맞아야 급여가 보장되고, 무언의 경쟁을 부추기는 생산라인이니만큼 작가에게는 긴장의 연속이다. 숙련되 그에 비해 ‘나이도 많지, 손도 재바르지 않지, 그렇다고 말도 잘 하지 않는 고집불통형’인 작가는 그의 입장에서 작가는 탐탁지 않은 팀 동료다. 실수할 때마다 말 대신 얼굴만 빤히 쳐다보는 그가 마땅치 않기는 작가도 마찬가지다.

 

그는 나를 일주일동안 파악했으리라. 별것 아니니 마음대로 주무르면 되리라, 아니면 직장 선배로서 온건주의자보다는 강건으로 치달아 자기의 수입에도 더 가산점을 얻으려고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종률의 [2인1조]중에서-

 

작가는 이 시점에서 “미소작전과 맞대응”, 즉 “아니야 나이 든 네가 참아야지”와 “지금이 기회야, 큰소리쳐야 한다.” 사이를 넘나들며 갈등한다. 과정이야 어찌되었건 현재는 입사서열이 늦은 작가가 약자의 입장이다. 작가는 갈등 속에서 결국 자신의 고집을 꺾기로 결정한다. 여기까지였다면 독자는 이 작품에 주목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 나는 보았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다른 일을 하고 있는 동안 보이는 가는 목덜미와 야윈 어깨를, 언뜻언뜻 비치는 지천명의 흐릿한 그림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그가 나를 미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한 때는 수십 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중소기업 사장이었다고 양념처럼 떠벌리던 그, 그 또한 온갖 체면을 극복하며 늘그막에 여기까지 왔으리라.

-우종률의 [2인1조]중에서-

 

그 역시 작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삶의 장강을 건너 예까지 이르렀으리라. 그렇다면 인간적인 연민을 느낄지언정 그와 대척점에 설 이유가 없음은 명백해진다. 그의 ‘가는 목덜미와 야윈 어깨’에서 동병상련의 애틋함을 느끼게 된 작가의 국면전환은 노련하다. 2인3각의 경기에 비유한 그들의 팀플레이는 필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만의 아픔이라고 생각한 문제가 그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지천명의 흐릿한 그림자”, “온갖 체면을 극복하며 늘그막에 여기까지” 오게 된 그에게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투사한다. 각자 자신의 몫인 세상의 등짐을 진 듯한 동류의식도 느꼈으리라. 그 과정을 통해 고립감과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감정 이입과 공유를 통해 긍정적인 태도를 회복해 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도 치밀하다.

“수필은 일상성에 대한 사람”이라는 말처럼 우종률은 신산(辛酸)한 삶에서 골라낸 금싸라기 같은 체험을 수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작가는 자신이 처함 삶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통찰의 단계에 이르렀으며, 작가의 개성을 작품의 개성으로 전환하였다. 수필은 작가의 생활 체험과 사유를 정련하여 형상화 과정을 거쳐 산출된 문학작품이다. 이 또한 사회적 의식의 한 형태이므로 다른 사회적 생물과는 다른 차원 높은 정신활동의 산물이다. [2인1조]는 평범하고 남루한 일상이 아닌 삶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눈으로 바라본 의미있는 사건이 되었다.

“앞으로 그의 말에 대거리를 하지 않고 일을 숙지할 때까지 침묵하라.” 는 작가의 결심에 힘을 실어주고 싶은 마음이 비단 필자만의 것이랴.

 

대상에 말 걸기를 통한 진정한 치유 ; 조현태의 [흔적]

 

수필은 장르의 특성상 설득력이 강하다. 작가가 자신의 의도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면 독자는 공감하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조현태의 [흔적]은 수필의 특성을 잘 살린 작품이다.

허리께에 옹이가 단단히 박힌 늙은 참나무. “크기가 한 아름이나 되는 혹 모양이 마치 함지박을 엎어서 허리에 차고 있는 형상”인 그것을 보며, 작가는 나무가 그 세월을 어찌 견디어 왔는지 묻고 싶다. 나무의 형상을 보아 넘길 수 없는 이유는 늙은 참나무에서 작가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껍질이 벗겨지고 진물도 나면서 쓰리고 아픈 것은 그래도 덜하다. (중략)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가도 좀처럼 가시지 않는 아픔이 있다. 그것은 마음에 새겨진 아픔이다. 참나무에게 물어보나마나 정신적으로 아파했던 모습이 훤히 보이는 것은 나도 가슴 속에 큰 상처를 받아 아파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면서부터 앉은키는 남보다 크면서 다리만 유난히 짧아 난쟁이처럼 보이는 것도 그렇고 눈이 하나밖에 없는 것도 남다른 모습이다. 겉모습이 남다르기 때문에 냉대 받았던 청년기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조현태의 [흔적]중에서-

 

지금껏 작가의 세상살이는 녹록치 않았다. 취업만 해도 그렇다. 사진이 첨부된 이력서 통과도 만만치 않거니와, 면접은 “새끼줄을 바늘귀에 끼워 넣기 만큼이나”어려웠다. 현대 우리 사회의 청년실업 문제와는 다른 상황이다. 업무 수행에 지장이 없다 해도 외모로 인한 세인들의 선입견은 높고 두꺼웠다. 외형만 추구하는 현대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씁쓸한 현실이다. 회사측의 우려 속에서 모 기업에 채용되어 성실성을 인정받았으니, 그간 작가가 겪은 아픔과 고초를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작가는 자신의 채용을 거부하거나 수용한 회사의 관점은 “틀리게 보는 것과 다르게 보는 것”의 차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다른 것과 틀린 것의 차이에 대해 무신경하다. 그것을 혼돈하는 일도 다반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것만 수용할 뿐, 자신과 다른 것을 틀렸다고 생각한다. 물론 착각이다.

 

내가 남들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안다. 그래서 어릴 때는 늘 움츠리게 되고 당당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기가 두려웠고, 행여 흉이나 보지 않을까 하는 소심한 행동이 버릇처럼 되었다. 장난기가 거침없는 중학교 시절부터는 내 이름대신 ‘애꾸’라고 부르는 또래들이 점점 늘어갔다. (중략) 참나무 허리에 큼지막한 혹처럼 엉뚱하고 흉측하게 자국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그만한 진통의 과정을 거치며 아우르고 있다는 증거다. 어쩌면 참나무의 혹 같은 것이 내 가슴속에 아직도 응집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조현태의 [흔적]중에서-

 

작가는 의식에 각인된 육체적 정신적 경험을, 늙은 참나무를 통해 재구성했다. 작가의 아픔이 담긴 내적 고백은 의미화를 통해 독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독자에게 전이된다. 독자는 작가의 아픔과 조응하는 자연스러운 경험으로 인해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고, 작가는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다. 문학이 무의식의 소산물이라는 점에서 치유 효과는 살아있다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몸서리나는 아픔을 감내하며 커다랗게 생긴 생채기를 안은 채 스스로 치유해 왔을 참나무와 우리만의 대화를 한다. “이 흔적이 애처로워 보이는가? 혹 덩어리는 철따라 도토리를 맺고 익게 하는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고 느스레 웃음을 짓는다. 나 또한 “세상 여는 사람들처럼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잔다.”는 대답으로 맞장구를 친다.

-조현태의 [흔적]중에서-

 

작가와 참나무는 결미에 이르러 우리라는 공동체가 되었다. 진정한 치유는 자기 고백에서 출발하여 타인(대상)에게 말 걸기라고 했던가. 흔적에서 작가가 참나무에게 적용한 투사(投射)는 자신의 심리적 속성을 긍정적인 정신 작용으로 적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 또한 여느 사람들처럼 밥도 잘 벅고 잠도 잘 잔다.”며 여유롭게 응수하는 작가의 내면은 비로소 고통을 딛고 나무와 동질성을 회복했으리라.

자신도 모르게 내면의 상처를 들추었다가 누군가에게 위로받았던 기억이 있는가? 독자는 조현태의 [흔적]을 통해 진정한 위로와 치유로서의 문학의 힘을 공감하지 않았을까. 늙은 참나무는 나무로서의 소명에 충실했으며 작가는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가장으로서 역할에 부족함이 없다. 도대체 무엇이 문지란 말인가.

외모는 인간의 의지와는 무관한 불가항력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모가 삶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인 양 그것에 집착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외모지상 풍조는 사회적 화두를 넘어 인간이 상품화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사회 통념은 인간 본질을 추구하기보다는 인간의 존엄을 외모로 짓밟는 현대 사회의 새로운 차별 요인이 되어버렸다.

수필은 단순히 삶의 기록으로만 그치는 글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열어주기도 한다. 작가 자신의 탁월함을 은근히 과시하려는 동기로 쓴 수필은 실패를 보장한다.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이나 좌절의 순간을 진솔하게 드러낼 때라야 독자의 마음을 얻기 때문이다. 작가는 자신이 직면한 현실에 최선을 다해 슬기롭게 대처해 왔다. 그 과정에서 자신에게 아픔을 주었던 과거의 경험에서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이제는 넉넉한 마음으로 그 아픔의 시간을 떠나보낼 수 있으리라.

문학의 여러 기능 중 특별한 기능인 ‘정화’는 작가 자신의 감정을 해소할 뿐 아니라, 작가의 상처는 객관성을 얻어 치유 바이러스로 전파된다. 이처럼 소리 없이 복원되고 치유되는, 저마다의 상처를 감싸는 붕대와 같은 수필을 읽을 때면 정채봉의 시구가 떠오른다.

“울지마,

이 세상의 먼지 섞인 바람 먹고 살면서

울지 않고 다녀간 사람은 없어.”

 

끝나지 않은 꿈 ; 이윤경의 [꿈꾸는 시간]

 

조선의 화가 안견이 안평대군의 무릉도원에 대한 꿈 이야기를 듣고 그린 산수화,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의 한시적인 특별전에 관람객이 너덧 시간 줄을 설 정도로 세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나, 다시 소장국인 일본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불후의 명화, 몽유도원도.

작가는 무릉도원이 손에 잡힐 듯 재현된 몽유도원도를 앞에 두고 있다. “타국의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서 둥그렇게 말려있던 오백년 전 한 왕자의 꿈”에는 현실과 이상이 공존하고 있다. 작가는 세월을 입어 누렇게 바랜 안견의 화폭에서 금빛을 본다.

 

그림의 금빛 속에서 나는 눈부시게 반짝이던 오래 전 그 강가의 모래밭을 기억해 냈다. 어린 시절 가끔 어머니를 기다리며 방천에 쭈그리고 앉아서 강이 흐르며 밀어올린 모래의 무늬들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이윤경의 [꿈꾸는 시간]중에서-

 

몽유도원도의 금빛이 유년의 모래밭으로 이동하는 국면 전환은 오버랩되는 영상처럼 자연스럽다. 화폭에 정지딘 시간, 그림의 금빛은 오래 전 고향 강가에서 보았던 모래밭으로 대치된다. 작가는 유년시절 어머니를 기다리며 보았던 금빛무늬를 떠올린다.

당시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남긴 빛과 노쇠한 어머니를 배려한 작가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안이한 학교생활은 사치라는 결론을 내린다.

 

집을 떠나기 전날, 나는 강가에 나갔다. 겨울바람에 모래가 날려 뿌옇게 시야를 흐려놓았다. 세상이 온통 누런빛이었다. 빛 가운데서 나는 오랫동안 꾸었던 꿈을 생각했다. 내일이면 도시의 공장으로 떠나야 하지만 이 빛을 빛 가운데서 찾은 꿈을 내 속에 깊이 새겨 두었다.

밤과 낮의 생활이 수시로 바뀌었다. 공장과 학교를 오가며 쓰러져 눕고 싶을 때도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그 빛이었다. 그날 보았던 빛이 한 순간도 꺼지지 않고 늘 내 안을 밝히고 있었다. 내가 밟고 서있는 현실에서는 희망이라고는 없었다. 열여섯의 내가 감당해 내기에는 벅찬 세상에서 나는 홀로 서야 했다.

-이윤경의 [꿈꾸는 시간]중에서-

 

작가가 주경야독의 여건에서 찾은 삶의 등대는 책이었다. 자신의 유토피아를 책 속에서 만났고 작가의 꿈을 키워갔다. 작가는 자신의 아픈 시간을 이야기하며, 한 올 한 올 섬세한 언어 직조로 새살이 돋은 상처를 보듬었다. 그 풍경을 아스라한 아름다움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본질을 에둘러 표현하는 특유의 기법을 구하사고 있다.

문득 열다섯 살 때 오빠를 따라 상경해 산업체 특별학급에서 문학의 꿈을 키웠고, 그것을 이룬 소설가 신경숙이 떠오른다. 대중과 평단에서 늘 주목받는 그녀는 자신의 소설에서 시대상을 소리 높여 반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 시대 저변의 깊은 감수성을 은근하게 파고든다. 지극히 개인사적인 이야기를 통해 독자들의 보편적 감성을 물들인다. 이윤경의 수필을 읽으며 신경숙을 연상한 것은 삶의 성장통 과정에서 품었던 문학에 대한 꿈, 그 끈을 놓치지 않았던 동질감 때문이리라.

다시 몽유도원도로 돌아온다. “오래 전 금빛으로 반짝이던 모래밭에서 내가 본 것도 미래였다. 미래에 대한 내 꿈이었다.” 결미를 살펴보자.

 

몽유도원도를 보고 나온 사람들은 모두 꿈을 꾼 듯한 얼굴이다. 그 얼굴에서 감동으로 빛나는 금빛이 엷게 묻어나온다. 두루마리처럼 내 앞에 펼쳐진 길을 따라 걸어 나왔다. 가을 볕이 눈부시다. 이제 다시 꿈을 꿀 시간이다.

-이윤경의 [꿈꾸는 시간]중에서-

 

“두루마리처럼 내 앞에 펼쳐진 길”과 같은 시각적 상상력이 드러난 결미는 “금빛 태양이 두루마리 위로 길게 늘어져 있다.”로 시작되는 첫 문장과 수미쌍관을 이루고 있다. 글쓰기는 목적을 가진 의사소통 수단이다. 여기에서 주제 구현을 위해 배치한 서두와 말미는 일관성을 유지하며, 작가의 꿈이 다시 시작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더불어 여운을 남김으로써 독자 나름대로 사고하고 유추할 수 있는 상상의 폭을 넓혀 주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심연에 꿈 하나쯤은 지니고 산다. 마음 깊이 똬리를 틀고 있을 꿈의 정체를 확인하는 일은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선물한다. 우주에서 가장 강렬한 자장을 내뿜는 자석으로서의 인간, 그 자석에서 방사되는 자기력은 바로 나의 생각이고 꿈이다. 그렇다면 나의 현재는 과거의 결과물이다. 독자들로 하여금 꿈을 이루기 위해 거쳐 온 많은 고비를 떠올리며 앞으로 건너야 할 강을 가늠해 보게 한다.

 

일상의 위트있는 재발견 ; 신현식의 [파일 지우기]

 

끝으로 놓치기 아쉬운 작품이 있다. 신현식의 ‘파일 지우기’다. 복잡한 업무를 어렵사리 마무리한 여름날, 심근경색의 병력을 가진 작가는 극심한 통증을 느낀다. 대학병원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죽음에 직면한 듯한 극심한 고통의 와중에도 자신의 신변정리를 생각한다. 작가가 응급실로 이동하는 중 걱정하는 것은 흔히 예측하는 유산 분배나 유언 등은 아니다.

 

세상에 큰 보탬도 주지 못했지만 크게 욕먹을 짓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다지 추한 모습은 아니다. (중략) 그런데 아까부터 마음 한 구석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수필의 원고가 떠오른 것이다. 두 번째 작품집을 위해 원고를 저장 중이다. 내가 가고 나면 식구들이 책은 펴내 줄 것이다. 문제는 몇 편의 파작이 있다는 것이다. (중략) 그것이 책으로 나온다면 웃음거리가 될 게 뻔하다. 또 하나는 친구가 보내온 메일이다. 어느 여배우의 나신인데 지우지 못한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것들을 지워야 한다. 그렇다고 지금 집으로 갈 수도 없다. 어쨌거나 지금 해야 할 일은 응급실로 가서 접수를 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신현식의 [파일 지우기]중에서-

 

생명의 위급을 다투는 상황에서 작가는 미처 삭제하지 못한 수필 몇 편과 여배우의 나신이 담긴 파일을 떠올린다.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자정이 가까워서야 병원을 나선 작가는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응급실에서 통증을 달래며 “제발 집으로 돌아가 파일을 지울 수 있게”되기만을 빌었다. 어떤 이는 교통사고로 응급실에 실려 가면서 자신이 입고 있던 남루한 속옷만을 걱정했다던가.

 

집에 들어서자마자 종일토록 신경을 곤두서게 했던 그 파일들을 바로 지워버렸다. 가슴은 계속 뻐근했지만 파일을 지워서일까,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신현식의 [파일 지우기]중에서-

 

유머는 습관화된 일상과 되풀이되는 타성에서 잠재된 볼만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수필에서 해학의 경지는 단순한 발현은 아니다. 지적인 시각과 융통성있는 인간관계에서 더욱 빛을 발하며 수필의 맛을 한층 더하여 주는 양념의 구실을 한다. 사람들은 지친 일상에서 여유를 잃고 진화되지 못한 유머 감각은 도태되었다. 작가가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에서 붙들고 있는 일상의 재발견은 독자를 방긋이 웃게 한다.

김광섭은 그의 [수필문학 소고]에서 ‘수필은 단순한 기록에 그쳐서는 우리의 흥미를 진작시키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유머가 있어야 하겠고 위트가 있어야 한다. 전자는 무의식적 속성에서 피는 꽃 같은 미소요, 후자는 지혜와 총명의 샘과 같다’고 한 바 있다. 유머나 위트가 없다면 자칫 생활의 평면적 넋두리로 전락할 수 있음을 경계한 것이리라. 피천득 또한 수필에서 유머와 위트를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있는 무늬’라 했다.

유머의 본질은 고정관념과 무관하게 행동하는 것이다. 다소 익살맞고 희극적인 감정을 글로 재현하는 수필의 유머성은 작가의 심적 여유를 드러낸다.

나아가 독자는 작가에게 친근감을 갖게 되고 숨겨진 인간적인 약점을 들추어보는 재미와 긴장해소를 맛본다. 우리 삶이야말로 변주되고 반복되는 오래된 농담이 아니겠는가.

 

나가는 말

 

문학의 본질은 인간의 삶과 관련된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탐색이다. 나아가 진정한 문학은 독자를 감동시키고 삶의 의미를 알게 해 줌은 물론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길잡이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기도 한다. 최재서는 이를 “문학의 교양적 가치”라고 말한바 있다. 일상적 삶이 진행 중인 작가의 현실에서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은 영원한 과제이다.

1인창 고백적 성격의 수필에서 작가의 의식은 대부분 내면적 반성의 경향을 띠게 된다. 체험과 사색의 산물인 수필에서의 작가의 내면적 반성은, 경직된 사고에 갇혀 교훈적인 면을 내비치며 식상한 마무리로 치닫게 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진정한 규명과 심연에 존재하는 갈등과 혼란의 원인을 파악해야 한다.

어느 시인은 ‘피로써 시를 쓴다’고했던가. 이는 물론 외과적 손상을 빗댄 표현은 아니다. 작가는 작품으로 인해 만만찮은 내상을 입기도 한다는 창작의 어려움을 빗댄 말이리라. 작가는 창작 과정에서 자신의 상처를 직시하며 통찰과 재구성을 거친다. 과거에 경험한 슬픔이나 현재의 고통과 고뇌를 생생하게 재현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재인식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스스로에 대한 감정 극복과 순화, 나아가 정서 회복을 맛보기도 한다. 아울러 감정 조절의 능력도 발달시킨다. 이른바 문학의 치유적 기능이다.

문예지에 수많은 수필이 발표되고 있지만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을 실증하듯 가슴에 오래 남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위에서 살펴본 작품들은 대상과 화제의 의미화라는 수필창작의 기본원리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진솔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나’의 이야기에서 시작하였으나 결국 삶의 보편성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내 안의 혼란과 갈등을 치유해 나갔다.

이외에도 가정의 리더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고 늙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약화된 개체로서의 노인의 문제를 제시한 임수진의 [딱실 가는 길], 최윤정의 [홍시가 녹기 전에]도 인상적인 작품이었다. 노혜숙의 [나를 잃어버린 자의 노래]역시 심리적, 사회적으로 소외된 요양원의 치매 노인의 소멸된 자의식과 자신의 의식구도를 심도 있게 파고들었으나 다음기회로 미루기로 한다.

지면상 상세하게 언급하지 못한 여러 작품들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계간 수필세계 27호에서>

 

 

 

*엄현옥 / 1996년 [수필과비평]등단, 인천문학상, 신곡문학상 본상, 인천pen문학상 수상. 에세이포레 주간. 수필과비평 이사. 선수필 편집위원. 한국여성문인회 회원. 작품집-[다시 우체국에서], [나무], [아날로그-건널수 없는 강], [질주], [작은 배]

 

*출처-수필세계27호

출처 : 꿈꾸는 정원에서
글쓴이 : 희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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