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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엄격해야

by 미루me 2012. 3. 22.

     - 어른의 '큰 기침소리(권위)'가 사라지고나서 사회기강도 무너졌다 -

 

                                            윤승원 수필가   

 

 

엊그제 선친 기고(忌故)가 있었다. 엎드려 독축(讀祝)을 하면 아버지가 실제로 나타나셔서 바라보시는 것만 같다.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 생시에는 기를 못 펴고 살았다. 표정은 언제나 근엄하시고 말씀은 늘 엄격하셔서 매사 조심스럽기만 했다.

 

요즘 자식들을 자유분방하게 키우는 집안에서는 아버지가 뭐라 한 마디 가르치려고 하면 ‘잔소리’라고 듣기 싫어하지만, 나의 유년시절에는 어르신의 훈계를 ‘잔소리’라고 버릇없이 말하지 않았다. 어머니나 형님들도 아버지가 뭐라 말씀하시면 ‘아버지 걱정하신다’라고 높여 말하고, 그 뜻을 존중해 주었다.

 

객지에서 공부하다가 주말이 되면 집에 온다. 단 하룻밤 자고 휴일 오후에 떠나는데, 이때도 아버지께 꾸뻑 고개인사만 하고 떠나지 않았다. 꼭 큰절하면서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 올렸다. 원거리를 다녀와서도 “잘 다녀왔습니다.”라고 꼭 큰절했다.

 

지금 생각하면 바쁜 시간에 서로가 번거로운 일인데도 당시에는 그렇게 하는 것이 몸에 배어 조금도 귀찮다거나 번거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시대가 변하여 집집마다 아버지의 ‘큰 기침소리’가 사라지고 나서 사회기강도 무너졌다고 나는 믿고 있다.

 

요즘 마음의 여유가 있어 색 바랜 고전을 자주 들춰 보는데, 그 중에서 ‘격몽요결(擊蒙要訣)’이나 ‘명심보감’을 다시 읽을 때마다 선친의 근엄한 얼굴이 떠오른다. 생시에 강조하셨던 말씀들이 모두 그 속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글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신 농사꾼 아버지가 그런 책들을 죄다 꿰듯 말씀하셨을까 신기한 일이다. 추측컨대,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그런 가르침을 이어 받으셨으리라.

 

격몽요결 ‘사친장(事親章)’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천하의 모든 물건은 내 몸보다 소중한 것이 없다. 그런데 이 몸은 부모가 준 것이다.(중략) 날마다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부모가 주무시는 곳으로 간다. 목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춥고 더운 것과 편안한지 불편한지를 여쭌다. 또 날이 어두우면 이부자리를 깔아 드리고 따뜻한지 서늘한지를 여쭌다. 집을 나가거나 밖에서 돌아와서는 반드시 절한 다음, 인사를 여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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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의 손때 묻은 '격몽요결(擊蒙要訣)' - 어떻게 글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으신 농사꾼 아버지가 이런 책들을 죄다 꿰듯 말씀하셨을까 신기한 일이다. 추측컨대, 아버지는 할아버지로부터 그런 가르침을 이어 받으셨으리라.

 

물론 이런 가르침을 다 실천에 옮기기엔 현대인들에게는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적어도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은 가정에서부터 ‘소통’을 위한 기본적인 장치였던 것이다. 좋은 음식만이 효가 아니다. 걱정을 하지 않도록 해드리는 것이 효의 근본이다.

 

예나 지금이나 ‘백행의 근본은 효’라고 하는데 불변의 진리다. 자녀를 둔 부모들이 흔히 밥상머리에서 하는 교육도 새롭게 지어낸 것들이 아니다. 소학(小學)이나 동몽선습(童蒙先習)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이규태(1933~2006)박사도 ‘윤리지수(倫理指數)’라는 글에서 공존공생해야 하는 인류사회에서는 고도의 지능보다 남을 배려하고 남과의 관계덕목을 고양시키는 윤리적 성숙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이 세상 어느 나라보다 윤리의식을 강조했던 우리의 전통사회에서는 가문마다 ‘윤리측정’기준이 있었다고 한다.

 

가령, ▲그 가문에 족보나 전래된 문집이 있는가, ▲조부모나 부모에게 문안드리는 가풍이 있는가, ▲가문에 그 집 나름의 전승되는 음식솜씨가 있는가라는 항목에서부터 

▲밥 먹을 때 어른보다 먼저 숟가락을 들거나 숟가락을 놓지 않는지, ▲길 다닐 때 신발 끄는 소리를 내거나, 신 뒤축을 꺾어 신지 않는지, ▲남들 앞에서 잇새 쑤시지 않는지, ▲깨금발 딛고 담 넘어 보지 않는지, ▲개나 닭을 쫒을 때 험한 욕설을 내뱉지 않는지 등 혼담이 오갈 때도 예비신랑신부의 윤리측정 ‘내탐’ 항목이었다고 한다.

 

얼마 전에 ‘대전수필문학’카페에 수필작가 L씨의 여행담이 올라 왔다. 새 며느리를 얻은 집안의 가장이었다. 온 가족이 동해안 여행을 하다가 율곡 이이(李珥)의 생가에 들러 이런 글귀를 보고 아이들과 큰 소리로 읽었다고 한다.

 

“예(禮)가 아니면 보지를 말라, 예가 아니면 듣지도 말라, 예가 아니면 말 하지도 말라,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도 말라” 격몽요결 ‘지신장(持身章)’에 나오는 대목이다.

 

그는 이 글귀를 ‘여행에서 건진 값진 보물’이라고 말하면서 “(그 가르침대로 살아가려고) 늘 주문을 외고 있다”는 실천의지까지 덧붙였다. 필자도 댓글을 달았다. “유익한 여행하셨습니다. ‘격몽요결’은 오늘날에도 가정과 학교에서 인성교과서로 삼아도 좋은 책입니다.”

 

요즘 사회에 만연하는 막말이나 학교폭력 등도 누굴 탓하기 전에 가정교육을 먼저 돌아봐야 한다. 집안에서 아버지가 엄격해야 사회도 반듯해 진다. ▣

 

※ 이 글은 금강일보 2012년 3월 22일자에 게재된 필자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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