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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명/스크랩 정보

베트남 캄보디아 전쟁

by 미루me 2012. 8. 9.

1975년 4월 30일을 베트남 전쟁 종전(終戰) 기념일로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만,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일인 1978년 12월 25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베트남은 물론, 캄보디아에서조차도.

베트남은 어째서 이웃 공산국가 캄보디아를 침공했을까? 공산권 블록내(內)에서 발발한 최초의 전쟁으로 기록된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의 배경은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는 게 현실이며, 그걸 캐기 위해서는 우선 서로 다른 길을 걸었던 공산주의 노선 문제와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아야 한다.
 
친소(親蘇)노선을 걸었던 베트남 공산당과 마오이즘에 경도되었던 크메르루즈의 배후엔 각각 소련과 중공이 자리잡고 있었고, 이들 강국 사이엔 1960년대 상당한 수준의 국경 긴장이 고조되었다. 양다리 외교로 중소(中蘇) 양국의 지원을 받았던 하노이는 중공이 미국에 접근하자,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배신자로 간주하였으며, 동시에 베트남 국내의 중국계 화교(華僑)들을 신용할 수 없다고 여겨 배척했다.

한편, 1975년 봄 인도지나 반도의 공산화와 맞물려 캄보디아를 장악한 크메르루즈는 극단적인 마오이즘 노선을 강행, 중공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 이와 함께 국경선 문제를 내세워 인접국 베트남에 대해 빈번히 소요를 일으켰다. ...캄보디아의 거듭되는 도발이 현상적으로 베트남의 전면 침공에 빌미를 제공했다면, 베트남이 지녔던 '역사적인 욕망'은 내재적 원인으로 작용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시대 이전부터 중화제국(中華帝國)을 모델로 삼아 인도지나 전역을 아우르는 '대(大) 베트남' 건설의 꿈을 키워왔다. 이 욕망은 코민테른이 캄보디아와 라오스 공산당을 베트남 공산당의 하부기구로 인정, 인도지나 반도에 연방제 통일국가 건설을 명시하면서부터 현실로 다가왔다.

위성국가화(化)된 라오스에 이어, 다음 타겟으로 캄보디아가 지목되었다. 더불어, 캄보디아를 점령한 베트남이 태국 국경에서 소요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되돌아본다면, 베트남의 욕망은 침공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셈이다. 베트남이 10년간 캄보디아를 지배하면서 40~60만명의 자국민을 이주시켜 모든 분야에서 '베트남화'를 추진한 것은 침공이 단순한 군사 ・정치적 충돌만은 아니었음을 증명해 준다.

10년의 점령기간 동안, 베트남은 식민통치의 전형을 캄보디아 사회에 이식했다. 베트남어와 베트남 교과목을 의무화시켰고, 베트남 이주민들은 현지 주민들을 감시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헹 삼린을 앞세워 괴뢰정부를 수립, 베트남이 모든 분야를 관장했다. 각 장관들이 매일 아침 베트남 대사에게 직접 보고하여 일일 목표를 할당받았으며, 고위급 관리들은 베트남 여성과 정략 혼인을 감수할 정도였다.

경제적 수탈에 따른 고통은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국제 구호품이 베트남 당국의 관할하에 있었고, 배급 과정에서 부패가 만연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폴 포트 정권의 강박에 시달렸던 인민들이 베트남 치하에서 오히려 자유를 느낄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는데, 폴 포트 시절과 비교해서 '먹고 살기가 편해졌다'는 인민들의 정서가 침공 명분의 확보에 절대적이란 사실을 베트남은 간파했던 것이다. 

'악소문만 나돌았지, 실제로 베트남 병사로부터 공격을 당했다거나, 신체적 손상을 입었다는 증언자는 거의 없었다'고 당시, 태국의 캄보디아 난민촌을 취재했던 어느 일본 기자는 회고했다. 유혈(流血)통치를 경험한 여론이 반(反)베트남 감정과 베트남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점령을 용인했음을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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