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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상섭 수필의 특성

by 미루me 2011. 11. 27.

 

        염상섭 수필의 特性  

         -일상성의 진실과 아이러니-


   

1. 서언

廉想涉(1897-1963)은 한국근대문학과 삶을 같이한 작가로서 500여 편의 글을 남기었다. 그가 전념한 장르는 물론 소설 그것도 장편소설이지만 1920년대에는 대표적인 문학평론가이기도 했다. 한편 염상섭은 많은 잡문을 쓴 작가이기도 하다. 그 중에는 일상적인 삶의 흔적이 흠뻑 밴 글들도 많다. 隨感, 隨想, 時評이 이에 해당한다. 그의 글은 어떤 종류의 것이거나 거의 일상성의 진실과 아이러니가 배어 있다. 그가 바라보는 일상성은 모순과 부조리 즉 아이러니의 실체였다. 이 같은 현실에 기초한 그의 글은 소설, 평론을 제하고는 모두 잡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많은 잡문 가운데서 말하자면 수필다운 수필을 골라내는 작업이 이 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염상섭의 장․단편 소설 170 여 편, 평론 100 여 편을 제한 200여 편의 글이 말하자면 수필 아닌 수필에 해당하는 글이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몇 가지 기준을 설정하여 200 여 편의 잡문을 분류해보면 그 중에서 서정적 순수 수필에 해당하는 글은 대략 50 여 편이 된다. 그 기준은 첫째 발표 당시 신문, 잡지에 수필이라고 명시된 글과 둘째 필자 나름대로 수필다운 글이라고 인정되는 글로서 비교적 객관적이고 서정과 서사 면에서 수필적 성격을 띄고 있는 글이며, 셋째 수감, 수상, 시평적인 글이지만 비교적 그 형식과 내용 면에서 수필다운 면이 발견되는 글을 선정한 결과 일제시대는 20 여 편, 해방 이후에는 30 여 편이 선택되었다. 염상섭은 일제시대에는 소설과 평론을 많이 썼고, 해방 후에는 소설과 수필을 주로 썼다. 염상섭은 작가 생활 40 여 년 동안 소설 쓰기에 주력했다.

염상섭은 한국근대문학 그 중에서도 한국근대소설 양식을 확립한 작가다. 염상섭의 소설은 그만큼 오늘날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의 장편소설 16편은 한국 리얼리즘 문학을 대표하고 있다. 특히 <만세전>, <사랑과 죄>, <삼대>, <무화과> 등은 염상섭 문학을 대표하는 문학사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수필 또한 그의 분신으로서 엄연히 존재한다. 염상섭 수필은 여가에 씌어진 글이라 할 수 있지만 그 나름대로 염상섭다운 특징을 지니고 있다. 가려 뽑은 50 여 편의 수필뿐만 아니라 그 많은 수감, 수상, 시평을 통해서 일관되는 성격은 일상성의 진실을 통해 아이러니 미학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식민지 현실에 대한 부조리와 모순성을 일찍 간파한 염상섭은 비판적 리얼리즘 창작 방법을 통해 아이러니 미학을 성취하고 있다.

이 같은 공통적 입장에서 수필 영역을 바라볼 때 일정한 범위 내에서 그 특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일제시대 수필 중에서 <旱蓮이나 求景하자>, <菊花와 櫻花>, <浿城의 봄>, <少年 때의 일>, <비둘기 네 넋을 위하여>를 중심으로 논의해 보고자 한다. 해방 이후 염상섭 수필 즉 <老眼을 씻고>, <가을 소리>, <熱榻冷語>, <老兵의 獨白>, <돈>, <不似春>, <除夜漫言>, <복조리> 등 이외의 수필은 고를 달리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내가 「염상섭 연구」(1974)를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쓴 글이 <評論家로서의 想涉>(1963)과 <橫步隨筆小考>(1963)였다. 염상섭의 소설 연구를 위해 진행된 이 疏略한 글은 물론 나의 「염상섭 소설 연구」(1964)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작은 것이 아름답고 사소한 것이 크다는 말이 있듯이 염상섭의 수필은 적은 분량이지만 그만큼 아름답고 큰 글이다. 「염상섭 수필집」이 아직까지 한번도 출간된 바 없기에 여기에서는 되도록 본문을 많이 인용하여 가능한 한 염상섭 수필의 진면목을 직접 대면토록 하려 한다. 때늦은 감이 없지 않지만 뜻 있는 출판사에 의해 하루 빨리 염상섭의 수필, 수상, 평론집이 출간되었으면 한다.   


2. 自由 魂과 수필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씌어진 가장 자유로운 형식의 글이라고 한다. 수필은 자기 마음의 거울이라는 말도 있듯이 마음의 여유만 있으면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이 수필이다. 그런데 염상섭은 왜 수필다운 수필을 못 썼을까. 그 많은 글을 쓰면서도 그는 수필 쓰기에는 매우 인색했던 듯하다. 물론 그의 잡문을 모두 수필로 인정한다면 염상섭은 수필문학의 대가이다. 여기서 내가 그의 소설, 평론을 제한 단문 또는 장문을 잡문이라고 몰밀어 명명한 것은 그 글들의 형식이 매우 모호하기 때문이다. 염상섭의 소설 역시 단편소설과 중편소설의 분류가 모호하듯이 평론과 수필 또한 사실 뚜렷이 확연하게 구별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본다면 염상섭은 장편소설 이외에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기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출한 작가라 할 수 있다. 글 쓰기를 자유롭게 한 작가가 염상섭이라고 할 때 기질적으로 보면 염상섭이야말로 수필다운 인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자유정신의 발로는 또 하나의 형식을 이루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무형식의 형식의 글이 염상섭의 수필이다.

수필은 또한 진실한 자아의 표백이기도 하다. 그러나 수필은 어디까지나 진실한 자아를 보이면서 재치와 기교의 여유를 지녀야 한다. 수필에도 개성적 미감과 함께 憂鬱과 자학을 뛰어넘는 미소가 있어야 하고, 기쁨의 도약이 넘쳐야 한다. 승화된 자기감정이 순수하게 미화되어야만 수필로서의 맛을 지니게 되는 것이니 수필은 또한 자기표현과 자기 시도이면서 동시에 자기 속의 진실 된 자기를 뛰어넘음이 있어야 한다고 볼 때 염상섭의 수필은 한마디로 일상성을 뛰어넘어 일상성의 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소설이 객관적 진실을 구현하고 있듯이 그의 수필 역시 자아의 객관적 표출이라고 할 수 있다. 염상섭은 신문기자 또는 편집국장을 역임하면서 당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를 어느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끼었다. 그는 일생동안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살았지만 자기 집이 없이 가난하게 살았다. 그렇듯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서도 그가 자유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은 돈으로부터 초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모두 돈의 이야기가 바탕으로 되어 있다. 자기 자신은 돈으로부터 초월해 있으면서 작중 인물들은 모두 돈의 노예로 만들어버린 사실에 염상섭의 아이러니가 있다. 이것이 염상섭 문학이 오늘날 우리를 사로잡는 힘이요 매력이다.

더욱 일제시대는 민족의 수난기였다. 억압과 착취로 대표되는 식민지 사회는 한마디로 염상섭의 말을 빌면 “구더기가 들끓는 무덤이다.“ 염상섭의 이 같은 시대인식은 부정적 세계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식민지 사회에 대한 부정과 불만이 말하자면 그의 글쓰기의 기본 모티브였다. 개인적으로는 한일합방이 되자 군수로 있는 그의 부친은 하루아침에 실직이 되었다. 자기 맏형 昌燮은 일본 육군 중위가 되었다. 염상섭 자신은 15 살 도일하여 일본 유학생이 되었다. 3. 1운동이 일어나자 염상섭은 오사카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병고에 시달리다 귀국해 동아일보 창간 기자가 된 염상섭은 비로소 문학운동을 시작하여 「폐허」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개벽」에 그의 출세작 <표본실의 청개구리>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꾸준히 소설, 평론 쓰기에 전념했다.1) 이와 같은 사실을 놓고 볼 때 염상섭의 실체가 얼마나 아이러니한가를 알 수 있다. 더욱 염상섭의 경제적 생활을 일생동안 보살펴준 이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친일파였던 그의 맏형과 친구 秦學文이었다. 하지만 염상섭은 이들에 대해 한마디의 말이나 글을 남기지 않았다. 이들로부터 경제적 도움은 받으면서도 염상섭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들의 뜻과는 달리 염상섭은 항일운동을 벌였고, 민족문학을 했다. 물론 저들이 염상섭에게 친일을 강요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지는 것은 일반적으로 보았을 때 흔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실로 이 같은 일면이 염상섭과 그 문학이 우리의 흥미를 끄는 요소가 된다. 이 일은 자유 혼의 작가에게만 가능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염상섭은 무엇보다도 자유 혼의 작가였다.      


3. 旱蓮(한련)과 菊花(국화) 그리고 櫻花(앵화)


旱蓮과 白菊과 櫻花 그리고 비둘기로 표상 되는 염상섭의 일제시대 수필은 생명력과 자유 혼 및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명제와 인간다움을 지탱해야 한다는 당위는 염상섭이 민족수난기를 극복해야겠다는 각오와 함께 당시 염상섭이 보여준 세계인식이었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이 자유라는 사실과 인간은 살 권리가 있다는 그의 생각은 모든 존재에 대한 생명의 존엄성을 동시에 인정하게 되었다. 민족 생존이 위협받던 당시 식민지 사회에서 무엇보다도 요구되던 것이 민족 구원이요, 민족의 자주 독립이었기 때문이다. 이를 자각한 염상섭이 할 수 있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일제의 혹독한 압제를 자각한 작가가 취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길은 리얼리즘 창작 방법을 통한 작품 쓰기였다. 소위 현실 고발 즉 현실의 모순성과 부조리를 리얼하게 객관적으로 진술하는 일이었다. 염상섭은 소설에서는 기행문 형식을 통해 이를 실현했고, 수필에서는 비꼼과 비아냥거림으로서 이를 표출했다. 오늘날 염상섭의 소설이나 수필 그리고 평론이 연구 대상에 오르는 것도 그의 남다른 현실 인식과 이를 표출한 창작방법 때문이다. 민족의 극악한 수난기를 극복하려는 작가로서의 사명감과 양심은 그의 붓을 멈출 수 없게 했다. 더욱 1927년부터 37년까지 그는 하루도 빼 놓지 않고 신문에 소설을 연재했고, 시사문제에 직접 참여했다. 그 많은 글들이 이를 한마디로 증명한다.

한련이나 국화나 앵화 그리고 비둘기 등 식물과 동물의 생명의 존엄성과 그 아름다움을 통해 민족의 고통을 아울러 증언하고 동시에 일제의 포학한 정치를 매도하는 풍자와 비꼼은 염상섭 같은 작가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했다. 그의 장편소설에 나타나는 테러리스트나 그가 보여준 테러리즘은 당대 어느 작가도 흉내낼 수 없었다. 오늘날 그의 작품이 문제작으로 논의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염상섭의 일제시대 수필을 통해 우리는 그의 항일정신과 민족의 식민지 현실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극복하려는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염상섭이 앵화보다는 백국을 좋아하고 한련을 찬미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한련을 통해 생명의 오묘함을 강조하고 백국을 통해 민족의 순결과 영원성을 강조하면서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것 그 자체가 곧 한민족의 생명과 그 문화의 영원성과 순결함을 강조한 것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도 꽃 중에서 흰 국화를 좋아한 염상섭은 죽어 가는 그 순간에도 자기 머리맡에 “흰 자기 병에 흰 국화를 꽂아 달라.“고 부인에게 말할 정도였다.

<旱蓮이나 구경하자>2)는 그 제목을 바꿔 「旱蓮꽃 求景」3)이라 하여 1935년에도 발표할 정도로 염상섭 자신이 아끼던 글이다. 작품 내용은 여름철 덥다고 별안간 산천을 찾고 자연을 예찬하는 도회인들의 얄팍한 인심을 냉소적으로 비난하고, 보다 근원적인 삶의 지혜를 갈파하면서 피서와 함께 오묘한 생명력의 신비를 터득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오락가락하는 한 소나기가 퍼붓고 나니 푹푹 찌는 이 한 간 방에도 산들바람이 스쳐간다. 부자 이웃을 가진 덕에 뒷산 아카시아 나무 속에서 흘러나오는 쓰르라미 소리도 앞 동리 빙수가게에서 오전에 한 그릇 하는 얼음물만큼 배속까지 시원한 것 같다. 두어 평 좁은 뜰 울타리 밑에 심은 旱蓮 꽃이나 매만져주랴. 나가자! 조그만 수정 알의 여섯 모(角)에는 일 만이 천 봉의 자랑과 神秘와 奧妙가 갖추어 있지 않더냐4)


울타리 밑에 핀 한련을 통해 생명의 신비와 오묘함을 터득하려는 정신은 돈의 노예가 되어버린 도회의 인간들을 원망하고 이에서 한 걸음 나아가 현대인들의 삶의 모순과 부조리를 지적하고 있는 것 같다. 자연을 그리워하면서도 도회를 벗어나지 못하는 도시민들은 진정 자연을 사랑하고 생명의 신비를 터득해야 한다는 염상섭의 주장은 글자그대로 오늘날 우리가 부르짖는 자연보호 운동에 해당한다. 생명의 존엄성을 통한 자연보호야말로 진정한 자연과의 친화이기 때문이다. 

<菊花와 櫻花>5)는 일제시대 염상섭 수필의 대표작이다. 염상섭의 再渡日期에 일본 동경에서 씌어진 이 수필은 국화와 벚꽃을 통하여 양 민족의 정서와 성향을 은유적으로 표출했다. 염상섭은 이 글에서 일본 땅과 일인들에게는 벚꽃이 썩 어울리지만, 조선 땅과 조선인에게는 더욱 조선 고궁에 핀 벚꽃은 우리 정서와는 맞지 않는다고 갈파하고 있다. 함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흉내를 내 벚꽃놀이를 즐기니 안타깝다는 심정을 드러내고 있다. 이로써 일본의 조선 침략과 이에 일동화 되어 가는 친일군상을 은근히 풍자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대로 우리 정서에 맞는 꽃놀이가 제격이니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국화놀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염상섭의 예민한 감수성과 조화미에 대한 식견을 볼 수 있다. 그 한 예가 백국과 조선인의 정조에 대한 진술이다.    


나 一個人의 趣味로는 아무래도 국화를 엄지손가락에 꼽으랸다. 酒家의 趣味로 甘菊도 좋지만은 白菊같이 마음에 맞는 것은 없다. 국화는 隱士의 相이니 하는 象徵的 先入見으로가 아니라 어쩐지 어려서부터 白菊을 몹시 사랑하였다. 크지도 적도 않고 그리 헤벌어지지도 않은 白菊 한 송이를 하얀 沙器甁에 꽂아 놓고 먹 내 풍기는 案頭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무엇보다 좋다. 白色이라는 것은 寂寞, 孤獨, 單調한 빛이지만은 永遠性을 가진 端雅한 風味가 있는 것이다. 어떠한 엷은 빛, 沈靜한 빛이든지 間에 수명이 길지는 못한 것이다. 그리고 쉽사리 싫증을 나게 하는 것이나 白色은 正反對다. 조선 사람과 白色과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빛이지만은 單調하고 孤獨한 感覺 속에서 深遠하고 閒靜하며 端雅高潔한 맛을 즐기는 民族性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6)                        

                  

위의 글에서 보다시피 염상섭은 자신을 민족과 동일시하고 있다. 염상섭이 흰 국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흰색과 영원성에 있다. 白菊으로 상징되는 민족적 정서를 누구보다도 체질적으로 수용한 염상섭은 일생을 민족수난기에 살면서도 민족의 영원성과 민족의 정당성을 믿었던 것이다. 따라서 봄이면 벚꽃놀이를 즐기는 무리들이 날로 늘어나는 현상을 보면서 식민지화  되어 가는 민족의 현실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위 글에서 “어떤 엷은 빛, 침정한 빛이든 간에 수명이 길지 못하다.“는 것은 붉은 색의 벚꽃(엷은 빛, 침정한 빛)을 일컫는 것 같고 따라서 수명이 길지 못하다는 것은 일본의 식민지 통치도 그리 길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염상섭은 이 수필에서 국화와 벚꽃을 비유하기도 하고, 이들의 정취를 조선인과 일인들의 생활 정서를 통해 비교하기도 했지만 결론은 벚꽃은 일인들의 정취에 맞는 꽃인데 조선인들이 이를 따라 할 때 어색하기 짝이 없음을 비난하고 있다. 봄에 피는 벚꽃과 가을에 피는 국화는 그대로 양국의 민족성을 그대로 잘 드러내는 바이다. 염상섭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 글을 맺고 있다. 벚꽃이 일본의 사무라이 정신의 표상이라면, 국화는 조선의 선비 정신의 상징이다. 따라서 무인과 문인들로 대조되는 벚꽃과 국화는 그대로 양국의 민족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고 할 수 있다.    


上野公園의 지는 벚꽃을 구경하였다. 그러나 東京의 봄은 꽃의 봄이라기보다도 바람의 봄, 먼지의 봄이다. 동경의 꽃구경은 먼지 마시는 競技大會같았다. 서울에서는 요사이 昌慶苑에들 잘 가는지? 차차 달 밝아 오고 한참 놀아날 때다. 金剛山도 食後景이라고 日本 俗諺에는 “꽃보다 떡“이란 말이 있다. 배부르거든 벚꽃 구경이라도 하여두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은 아니다. (四月二十日 東京에서)7)


염상섭 글의 묘미는 비꼼, 비아냥거림이다. 여기서도 많은 국민들이 식민지 정책에 시달려 초근목피로 연명하고 보국대로 끌려가고, 정신대를 지망해야 연명할 수 있는 극악한 굶주림의 현상에서 벚꽃 구경이 웬 말이냐는 자기의 뜻을 “배부르거든 벚꽃 구경이라도 하여두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염상섭의 모든 글이 이 같이 비아냥거림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비아냥거림은 한마디로 자기 자신의 不滿心을 드러내는 방법이다. 이렇게 보면 염상섭 만큼 자기가 살아온 당대 현실을 강력히 부정한 작가도 드물 것이다. 

이상 旱蓮, 菊花, 櫻花를 통하여 염상섭 수필의 한 속성을 살펴보았다. 한련을 통하여 생명의 오묘함을 갈파했고, 국화를 통해 민족의 순결성과 영원성을 고취했으며, 앵화를 통해 일본정신과 그들의 정서를 인식했다. 염상섭은 생명력과 양국의 민족성을 꽃을 통해 은유 또는 비아냥거림으로써 수필의 격조를 한 층 더 드높이고 있다.          


4. 少年과 浿城 그리고 비둘기


<少年 때 일>8)과 <浿城의 봄>9)에서는 지난 일을 회상하면서 그때의 아름다운 정경과 아름다운 감정을 표출함으로써 악착한 현실을 순화하고 감정을 정화시켜 보려는 염상섭의 내면 풍경을 볼 수 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염상섭의 소년기의 서울 생활과 청년기의 평양 생활을 알 수 있다.

염상섭은 한일합당 당시 13살의 소년이었다. 그는 경복궁 동쪽 宗親府 古屋에서 성장했다. 집 앞에는 북악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천이 있었고, 아름드리 檜나무가 있었다. 염상섭은 부친(圭恒)은 지방 수령(군수)으로 늘 지방에 나가 계신 가운데 할아버지(仁湜) 밑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집 가까이에서 조총 소리가 그치지 않고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가운데 조선군대가 해산되던 날은 하루 종일 궁중에서 터져 나오는 총소리를 들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시골에서 돌아오신 후 杜門不出을 했다. 군수자리에서 쫓겨 난 것이다. 이렇듯 염상섭은 국가의 悲運과 집안의 沒落을 똑똑히 보면서 자랐다. 회나무 밑에서 혼자 쓸쓸히 여름이면 쓰르라미 소리를 즐기는 날이 많았다. 조부 밑에서 한문을 배우던 어느 봄날 염상섭은 길고 탐스런 댕기를 자르고 공립사범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이 글에서 우리는 이런 저런 일이 사실적으로 기록된 가운데 염상섭의 항일정신이 배어나는 애국심을 읽을 수 있다. 부친의 郡守職 罷職은 직접적인 항일의 동기가 되었다.


어려서부터 作亂도 할 줄 모르고 동무라곤 제발 끝에 차이는 제 그림자뿐이던 그 시절에는 그 檜나무가 이 세상에서는 아름다운 어린 空想을 자아내는 唯一한 벗이었다. 그림책 하나 동화 한마디 얻어 보고 들을 수 없는 고독한 少年은 우거진 고목 아래 쓸쓸히 앉아 쓰르라미 소리에 귀를 즐기며 뭉싯뭉싯 흐르는 앞 芥川의 썩은 물이 모든 것에 驚異와 好奇心을 가진 少年의 眼界를 占領한 自然의 全部였다.


남들은 머리 깎고 학교에를 다니는데 나는 언제나 가려는가 하고 제 당기 꼬리를 원망스럽게 휘어잡고 섰던 데도 이 회나무 밑이요, 첫겨울 모진 바람이 치내리고 치올리는 황혼에 홀로 서서 의병에 붙들리신 아버님 소식을 알려간 傳人軍을 기다리던 곳도 그 회나무 그늘이었던 것이다.

桑田이 碧海 되고도 살고 오백 년 옛 도읍을 지고 섰는 저 붉은 三門도 제자리를 못 지키거든 하물며 길가의 이름 없는 古木 한 그루쯤이야 무어 그리 아쉽다 하려마는 春風秋雨 二十년에 나는 과연 무엇하고 이날 이때 이 자리에 와 섰는고<이하 45행이 총독부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음>10)


위의 글을 통하여 우리는 염상섭의 어린 시절을 역력히 알 수 있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사실을 근거로 하여 풍자와 재치를 드러내는 글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염상섭의 수필가다운 일면을 알 수 있다. 회나무를 중심으로 자기의 어린 시절의 고독과 환경을 잘 보여주고 있다.

<패성의 봄>은 평양의 봄 정취를 보여주고 있다. 염상섭과 평양의 관계는 그가 1921년 한때 정주 오산학교에 근무할 때 비롯되었다. <표본실의 청개구리>의 배경의 일부가 평양의 대동강과 남포 그리고 정주로 되어 있다. 하지만 <패강의 봄>은 그 후 1929년 씌어진 수필로서 평양 여행기의 성격을 띄고 있다. 이 글에서 염상섭은 자기의 고향인 서울과 평양을 대비하면서 서울에서 느끼지 못한 정취를 흠뻑 느끼고 있음을 본다. 염상섭은 평양의 자연 풍경과 인물을 아울러 관찰하고 있다. 특히 그는 작가답게 여인들의 모습을 눈여겨 바라  보면서 평양 여인들의 인상을 “아낙네의 수건 쓴 머리와 손뼉 같은 자주당기와 검정 가죽신“에서 발견하고 있다.


曾遊之地의 風光을 엷은 記憶과 슬어진 인상에서 찾느니보다는 朝夕으로 그 山水에 相接하는 그 고장 사람에게 물음이 옳을 것 같다. 근년에는 전차도 깔리고 「뻐스」도 떨떨거리게 되었다하니 훨씬 현대화하여 古都의 情趣가 한층 더 깎이었겠지만 元來 이곳은 都市 美보다는 歷史的 意義의 名所古蹟보다는 人物風情에 人物風情보다는 自然 景勝에 더 마음이 끌리는 곳이다.


평양의 첫인상은 아낙네의 手巾 쓴 머리와 손뼉 같은 紫朱당기와 검정 가죽신이다. 깨끗하고 길음한 얼굴이나, 조촐하고 아담스러운 少婦의 姿態는 그 수건, 그 댕기에 한층 더 돋보인다. 그러나 그 산수가 規模에 째이고, 자그마하게 整頓되고, 幽邃함보다는 輕快하며 또한 婦女子들의 作態가 端正하면서도 「코켓틔쉬」 하니 만큼 인심이 얼마쯤 爻薄하고 狡猾하고 怜悧한 듯도 싶다.

봄의 평양보다는 여름의 평양이 더 濃厚한 色彩로 인심을 끌지 않을까 한다. 大洞江이 없었다면 평양의 가치는 반 이상이 消滅되었을 것을 大洞江이 있기 때문에 淸流壁, 浮碧樓, 乙密臺의 生色도 나는 것일 것이다. 하물며 여름 한철 大洞江畔에 歡樂景을 꾸미는 浿城人의 호강이랴11)


위의 글을 통하여 우리는 염상섭의 평양 인상기를 볼 수 있었다. 그가 주로 평양의 자연 경관과 인정을 아울러 고찰함으로써 평양의 정취와 정서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특히 평양인들의 생활 모습을 리얼하게 묘사해 실제감을 더 하고 있다. 마치 그의 장편소설의 한 대목을 읽는 기분이 든다. 그만큼 염상섭은 수필에서도 묘사를 중시했다. 

<비둘기 네 넋을 위하여>12)는 매우 긴 수필에 속한다. 마치 단편소설을 읽는 기분이다. 이 글은 염상섭이 결혼 초에 아현동 산등성이에 외딴집을 하나 얻어 살림을 나가 살던 시절 일어난 일을 소재로 하고 있다. 하루는 비둘기가 날아들어 추녀에서 초겨울의 찬비를 맞으며 오들오들 떨더니 그 이튿날은 두 마리가 되어 밤새도록 구구거리며 지냈다. 주인은 가난하여 비둘기장을 못 지어준다. 하지만 주인은 추위에 비둘기가 얼어 죽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그러던 차에 비둘기 한 마리가 피를 토하며 추녀에서 떨어져 죽었다. 주인은 몹시 슬픈 마음으로 죽은 비둘기를 들고 밖으로 나가 묻어주려 했으나 행인이 약에 쓰겠다며 죽은 비둘기를 달란다. 알고 보니 이웃집에서 산탄을 쏴 비둘기를 잡은 것이다. 이 같은 일상사를 통해 염상섭은 생명의 고귀함과 인간의 숭고한 휴머니즘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몰인정과 생명 경시 풍조를 고발하고 있다. 더욱 이들의 행동을 대조해 보여주고 있다.


立冬머리에 김장을 재촉하느라고 비가 오락가락할 때다. 오후부터 시작한 초겨울비가 가다가다 돼치는 것을 맞아 가며 돌아와 보니 집사람의 첫인사가 「웬 비둘기」가 제 집을 잃었는가봐요 다섯 마리나 날아 들어와서 비를 맞고 오들오들 떨고 있어요 한다. 밖은 훤해도 전등불이 들어온 뒤다. 나처럼 비를 맞았나보다 하고 己爲 비 맞은 옷이니 帽子만 벗어 던지고 뜰로 내려서서 지붕을 쳐다본즉 내 방인 건너 방 遮陽 위에 네 마리는 여전히 비를 맞으며 오르르 떨고서 옹기옹기 모여 앉았고 한 마리만은 그 옆에 처마 밑에 가로지른 나무대기를 홰로 삼고 들어앉았다. 이튿날 새벽에 露宿을 하였던 이 不意의 손님들은 물론 宿泊記도 인사 한마디도 없이 동틀 머리에 자취가 슬어지고 말았다.


어느 날이던가 눈발이 날리고 처음으로 호독갑스럽게 춥던 날이다. 혼자 음산한 방에서 원고를 써가며 집을 지키다가 앞 가게에 나가서 담배를 사 가지고 들어오려니 별안간 지붕에서 푸드득 푸드득 꾸룩꾸룩하며 야단이다. 깜짝 놀라서 치어다볼새도 없이 한편 눈에서 벌건 선지피를 쏟는 하얀 비둘기 한 마리가 하마터면 내 어깨를 칠 뻔하며 수채발치에 떨어져서 조그만 목통을 발딱거리며 그 하얀 털에 한 줄기 빨간 피를 철철 흘리고 다시는 날지를 못한다. 나는 가슴이 선듯하였다. 무슨 불길한 일이나 당한 듯이 저절로 눈이 찌프러지고 마음이 하늘빛같이 흐려졌다.    

위의 글에서 우리는 집 주인이 비둘기를 맞아들이는 장면과 그 비둘기의 죽음을 볼 수 있다. 주인은 이어 비둘기장을 지어주지 못한 죄책감과 인간들의 몰인정을 탓한다. “묻어 주려고 나가니까 마침 문전을 지나던 동리 한방의가 반색을 하며 나 달라고 하여 가져갔는데 배에서 좁쌀보다 큰 탄환이 하나 나오더란다. 듣고 보니 내 죄만도 같지 않거니와 어쨌든 죽어도 쓸모가 있는 품이 역시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했다.“에서 보다시피 비둘기의 죽음을 통해 추위에 떠는 비둘기를 불쌍히 여기는 주인과 비둘기를 총 쏘아 잡아죽이는 이웃 사람과 약으로 쓰겠다고 죽은 비둘기를 가져가는 한방의 등 세 사람의 행동을 대비하면서 염상섭 특유의 비아냥거림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수필은 곧 염상섭의 휴머니즘의 실체는 보는 듯해 감회가 돋탑다.  

  

5. 結語

                   

이상에서 염상섭의 일제시대 수필 5편을 선정하여 감상해보았다. 이밖에 많은 수필다운 글들이 있지만 우선 서정적 수필 그리고 어느 정도 공통적인 소재를 지닌 수필을 선택하여 논의함으로써 염상섭 수필의 특성과 묘미를 알아보려 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염상섭의 수필은 그의 장편소설만큼 높이 평가받을 수는 없지만 소설과 함께 염상섭 문학의 동질성을 함유하고 있다는 점과 수필 연구를 통해 소설 및 작가 연구에 알게 모르게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욱 정제된 수필보다는 수감, 수상, 시평, 기타 많은 잡문은 염상섭과 그 문학 연구에 필수적인 읽을거리가 아닐 수 없다.

위에서 감상한 염상섭의 수필에서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그의 선명하고도 투철한 전통적인 민족정신과 보편적인 인류애와 생명의 존엄성을 근간으로 한 휴머니즘 정신이었다. 근대문명을 지향하면서도 전통적 민족정신과 정서를 바탕으로 한 염상섭의 근대정신은 한마디로 민족수난기의 확인과 극복을 주요 과제로 하고 있다. 작가로서의 염상섭은 그의 모든 작품에서 한결 같이 비판적 리얼리즘 창작방법을 구현함으로써 문학적으로 이를 실현하였다. 그 대표적인 장르가 소설이었다.

다음으로 우리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염상섭은 당대 현실을 한결 같이 부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제식민지 사회를 강력히 부정하는 그는 당대를 “구더기가 들끓는 무덤“으로 인식하였다. 이를 척결하기 위해 그는 그의 문제적 장편소설에서는 테러집단을 등장시키었고, 소설에서뿐만 아니라 수필에서도 비꼼의 문체와 비아냥거림으로 일관하고 있다.

끝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위 수필에서도 보았다시피 염상섭은 꽃, 비둘기 같은 생명체를 통해 민족의 존엄성과 인류애를 확인시켜주었고, 회나무와 패성을 통해서는 시대성과 전통성을 아울러 보여주었다. 염상섭의 수필 역시 그의 소설만큼 묘사정신이 투철했으며, 아울러 서정적 미학과 함께 객관적 서사정신이 배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金鍾均 한국외대 교수.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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